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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we will not surrender until free energy will be enabled all over the world, to power planes, cars, ships and trains.
Free energy will help the poor to become independent of needing expensive fuels.
So all in all Free energy will bring far more peace to the world than any other invention has already brought to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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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s Kapanadze forum, FE builds circuits and comments

Started by AlienGrey, February 03, 2019, 05:22: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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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도덕경의 판본

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규정한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문장들은 왕필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마왕퇴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편집한 통용본보다 연대가 훨씬 앞섰다. 다시 말하자면, 왕필본의 저본이 바로 백서본인 셈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인 셈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BC 24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1993년 중국 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혹은 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백서본에는 있는 중요한 시문들이 많이 빠져있으나, 백서본에는 없는 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인 반면에 백서본은 비단에 쓰였다.
2. 곽점본의 내용 상당수가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다. 곽점본은 2,000여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다.
3.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4.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확인된다.
5.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이 더욱 반 유가적인 경향을 보인다.
6. 백서본이 곽점본에 비하여 정치술수적인 내용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어, 백서본 성립 시기에 유행한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통치술에 대한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7. 백서본은 음양사상을 받아들여 기화론적 우주생성론의 내용을 담고있다.

처음으로 도덕경을 상하로 나눈 사람은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이다. 완결편 도덕경 주석서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하상공'(혹은 '하상장인')이 지은 하상공장구가 있다. 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상공장구는 당나라 시기까지 가장 유행한 판본으로 양생론적 성향이 강해 초기에는 도교도들에 의해 많이 읽혔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판본이 되었다.

왕필은 18세이던 243년에 노자도덕경주를 완성하였고, 이후 그의 저서는 위나라의 재상 하안에 의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때까지만 해도 그의 구석서는 하상공장구에 비해 덜 읽혔으나 송나라때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주요한 판본으로 여겨지게 됐으며, 이 지위는 명,청대에 더욱 확고해져서 백서본 출토 이전까지 무려 천년 이상 동서양 도덕경 이해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을 유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았기에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다른점은 다음과 같다.

1. 백서본은 장절구분이 거의 없이 이어 적혀있었으나, 왕필본은 장절구분이 잘 되어있다.
2. 백서본은 덕경이 도경보다 앞에 놓이나, 왕필본은 도경이 덕경보다 앞에 놓인다. 다시 말하면, 백서본은 덕도경이라고 불릴 수 있고, 왕필본은 우리가 익히 들언대로 도덕경이라 읽는다.
3. 왕필본의 장절구분을 기준으로 하면, 백서본은 24-22-23장과 41-40-42장, 66-80-81장의 순서로 구성되어있다.
4.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시대 특성상 (가차자)가 많이 쓰였고, 따라서 그 글자들의 해석이 복잡하다.
5.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허사가 많이 남아있어 왕필본의 끊어읽기 문제를 다소 해결해준다.

곽점본과 백서본 그리고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은 일거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여러 생각과 사상들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는 만큼, 여러 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을 위한 음양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여겼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학적으로 여겼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사상들의 근간이 되는 저서로 여겼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B%8D%95%EA%B2%BD
https://namu.wiki/w/%EB%85%B8%EC%9E%90




마왕퇴 발굴 유물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Mawangdui?uselang=ko

道可道也, 非恆道也;名可名也‧非恆名也。無名萬物之始也∠有名萬物之母也□恆無欲也以觀其眇∠恆有欲也以觀其所噭兩者同出異名同胃玄之有玄眾眇之□

道可道也□□□□□□□□恆名也無名萬物之始也有名萬物之母也故恆無欲也□□□□恆又欲也以觀亓所噭兩者同出異名同胃玄之又玄眾眇之門
https://zh.wikisource.org/wiki/%E8%80%81%E5%AD%90_(%E5%B8%9B%E6%9B%B8%E6%9C%AC)


김용옥 뿐 아니라 노자 도덕경 해석의 기초가 된 왕필본과 마왕퇴 백서본은 빛과 어둠을 중국유학자들이 사단(四端) 견제차원 해석한 결과다.
기(氣)의 근본도 달의 어둠(玄)에서 출발한다.
리(理)의 근본도 달의 밝음(明)에서 출발한다.
기(氣)가 원초적 의미고, 리(理) 이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달의 밝은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두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싸우듯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노자가 無名/有名, 常無/常有 서로 대비되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았다면 可/非의 의미도 왕필본과 마왕퇴 백서본 해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道可道也, 非恆道也
無/有가 교차해서 도를 결정할 수 없는 것과, 둘 모두 도라고 확정하는 것은 다르다.
맹공자 유학 사조는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경쟁자인 노자의 도가 가타부타 의미가 확실해지면 경쟁자를 돕는 것밖에는 안된다.
노자의 도를 불명확하게 만들어 개념을 모호하게 둔다.
신비하게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지만 신비에 목숨거는 인간들이 도술처럼 인간계에 없는 모호한 환상에 현혹된거다.
도교와 신비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중국 유학자들이 도를 불명학하게 만들어 도교 전체가 허무맹랑한 도술 나부랭이 된거다.


孔子去(공자거) 謂弟子曰(위제자왈)
공자는 돌아 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鳥(조) 吾知其能飛(오지기능비)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魚(어) 吾知其能游(오지기능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獸(수) 吾知其能走(오지기능주)
"짐승들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走者可以爲罔(주자가이위망)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游者可以爲綸(유자가이위륜)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으며,
飛者可以爲矰(비자가이위증)
날아 다니는 새는 화살을 쏘아서 잡을 수 있다.
至於龍(지오룡)
그러나 용이 하늘에 이르는 것은,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오불능지기승풍운이상천)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서 하늘에 오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吾今日見老子(오금일견로자) 其猶龍邪(기유용야)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공자는 노자에 대해 공상망상하는 자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道可道也, 非恆道也
이 진입글을 노자가 말했다고 보기가 어려운게,
옥황상제, 원시천존은 헤드젯이고 영보천존, 태상노군은 달이라,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
참한 이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 잘하는 이는 참하지 않다.
아는 이는 넓지 않고,
넓은 이는 알지 못한다.
성인은 쌓지 않으니,
이미 다른 이를 위하기 때문에 자기는 더 가지며,
이미 다른 이에게 주기 때문에 자기는 더 많다.
하늘의 도는 해롭지 않고 이로우며,
성인의 도는 싸우지 않고 이룬다.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既以為人己愈有,
既以與人己愈多。
天之道,利而不害;
聖人之道,為而不爭。


빛을 다루는 태양신전에서 모호성은 유교의 사단심 견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사단(四端)
지금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측은(惻隱)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父母)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이 아니며, 향당(鄕黨)과 친구(親舊)들에게 칭찬(稱讚)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비난(非難)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판단(判斷)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仁義) 발단(發端)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발단(發端)이요, 사양(辭讓)하는 마음은 예의 발단(發端)이요, 옳고 그름을 판단(判斷)하는 마음은 지의 발단(發端)이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해치는 자요, 그 임금이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四端)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니, 만일 확충(擴充)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保全)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확충(擴充)시키지 못한다면 부모(父母)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유교가 보기에 도교는 임금은 물론 애미애비도 못알아본다는 뜻이다.
도교인들은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다.
해서 공자가 노자를 용으로 비유한거다.
현대 양자역학처럼 모호성에 기반한 도라고 유교가 도교를 깔아뭉겠다.
왕필본과 마왕퇴 백서본은 도교 견제가 목적인 유교 유학자들의 해석일 뿐이다.

달이 모호했다면 음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올김용옥] 동경대전 54 하나님(구약)의 '예언'과 동양의 '점' - 미래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 - "점쟁이의 예언은 인간의 상황은 가변적이라는 전제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8YACKsZOTY


옛날 유교 유학자들이 만든 도교 도술에 김용옥같은 무늬만 식자들이 함몰된 것은 양자역학이라도 되는냥 도덕경의 모호성이 주는 신비함 때문이다.

道可道也, 非恆道也
道可道非也, 恆道也

진입부에서 전자해석이 아닌 후자해석이였다면 오늘날의 도교는 천공같은 결벽증 무당들이 도인 빙자 갈취전문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게다.

color

 
Схема Алексеева нюансики
https://www.youtube.com/watch?v=mOP1uCqjZo8
Фазовая задержка в пушпуле, завал переднего фронта у теслы.


실험진전이 없는 유튜브는 구독 취소가 답이다.

color

 
https://strannik-2.ru/index.php/forum/svobodnaya-energiya/6-balabolka-bez-politiki?start=4095#80305

You are wrong.
Shakyamuni never spoke of the middle way.
An Indian man named Nāgārjuna (150? ~ 250?) interpreted the moon in his own way.
On the moon where light and darkness intersect, riding on the dark side is [Nothing, 無].
This is the meaning of the middle way.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공 사상(空思想)에서는, 공(空)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또한 대승불교 실천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대승경전 중 《반야경(般若經)》과 이에 입각하여 용수(龍樹)가 저술한 논서인 《중론(中論)》에서 명백하게 밝혀 두고 있다. 《중론》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법 · 존재 또는 현상은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다)"의 게송이 있다.

諸法有定性。則無因果等諸事。如偈說。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眾因緣生法。我說即是空。何以故。
眾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眾因緣故無自性。
無自性故空。空亦復空。但為引導眾生故。
以假名說。離有無二邊故名為中道。

是法無性故不得言有。亦無空故不得言無。
若法有性相。則不待眾緣而有。

若不待眾緣則無法。是故無有不空法。      
각각의 법이 고정된 성품(定性)을 지니고 있다면 곧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한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法: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無)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法: 존재)을 공하다(空)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한다.

법(法: 존재)은 고정된 성품(性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있음(有)"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法: 존재)을 "없음(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법(法: 존재)이 고정된 성품(性相 · 성상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난다).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법(法: 존재)은 없는 것(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음을 대전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즉, 연기하지 않는 존재 또는 고정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란 존재할 수 없다.
— 《중론(中論)》 4권 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 대정신수대장경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B%8F%84_(%EB%B6%88%EA%B5%90)

AlienGrey

Color Hi that Sergey pic it wont run as per circuit stuff is missing from it.

That Nick guy thinks it runs at 2mhz it doesn't it's the pulse that runs at hf
all the rest is sub sonic it says 15 khz in 2 places it ewould have to be.

Ps is that you with the long hair ?
Sil

color

 
불교의 교리 중도(中道)

가장 기본적으로는 무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대강 " '나'가 존재한다고 하면 상견이고,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견이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라는 묘사가 있다. 이것을 사람을 지칭하는 '인무아'에서 확장시켜 '법무아'로 진입한다면, "저것을 물병이라고 불러도 안 되고, 물병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부르겠는가?"라는 선문답이 완성된다.

상견, 단견
https://ko.wikipedia.org/wiki/%EB%B3%80%EC%A7%91%EA%B2%AC

무아(無我)는 브라만교의 아트만(atman:我)에 대비되는 말로서 이 말에는 '내가 아닌 것[비아(非我)]'이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 무아의 원어인 anattan(pali) 또는 anatman(skt)을 비아(非我)라고도 번역한다.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아집(我執)은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법무아(法無我)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에 대해, 유위법(有爲法)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즉 보리(菩提)가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



有異比丘來詣佛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
世尊。謂緣起法為世尊作。為餘人作耶。 
佛告比丘。緣起法者。非我所作。亦非餘人作。然彼如來出世及未出世。法界常住。
彼如來自覺此法。成等正覺。為諸眾生分別演說。開發顯示。
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故行滅。乃至純大苦聚滅。
—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 한문본

이 때 어떤 비구가 고타마 붓다가 있는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고타마 붓다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緣起法)은 당신께서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깨달은 이[餘人]가 만든 것입니까?"

고타마 붓다는 그 비구에게 답하였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所作]도 아니요, 또한 다른 깨달은 이[餘人]가 만든 것[所作]도 아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저들[彼] 여래들[如來]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세상에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존재한다[常住].

저들[彼] 여래들[如來]은 이 [우주적인] 법칙[法]을 스스로 깨달아 완전한 깨달음[等正覺]을 이룬다. 그런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이 우주 법칙을 중생들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러 형태로] 분별해 연설하고[分別演說] [중생들에게] 드러내어 보인다[開發顯示].

말하자면, [나의 경우에는 12연기설의 형태로 이 우주 법칙을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어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純大苦聚, 즉 5취온]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내지)......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純大苦聚, 즉 5취온]가 소멸한다'고 말한다."

—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 한글본
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A%B8%B0_(%EB%B6%88%EA%B5%90)




불교의 중도(中道)를 쉽게 말하면 태양신전 4줄 염주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상징하지만,
아펩신전에서 중도(中道)는 어둠 그 자체입니다.
태양신전의 별들은 빛나지만, 아펩신전은 빛들 틈에 낀 어둠이 중도(中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어둠신전에서 중도는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 연기(緣起)도 의미가 없습니다.
태양신전 맞춤용으로서의 중도이고 연기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입니다.
To put it simply, the middle way of Buddhism refers to the four beads of the sun temple.
It symbolizes the countless stars in the sky,
In the temple of Apep, the middle way is darkness itself.
The stars in the Temple of the Sun shine, but in the Temple of Apep, the darkness between the lights is the middle way.
However, since darkness is indistinguishable, the middle way is meaningless in the Temple of Darkness.
Similarly, acting is meaningless.
It is a midway and acting as a custom for the Temple of the Sun.
This is the law in Buddhism.